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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의 왕 (아틸라)

 

 
아틸라

훈족의 왕(434~453년 재위, 445년까지는 형 블레다와 공동 통치)


개요

로마 제국을 침략한 새외(塞外) 민족 최고의 왕이며 남부 발칸 지방과 그리스, 이어서 갈리아와 이탈리아까지 공략했다(→ 훈족). 아틸라는 중세 독일의 전설적인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 Nibelungenlied〉에서 에첼, 아이슬란드의 무용담에서는 아틀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로마사, 이민족 침입).


-. 동로마 제국 침입

아틸라와 형 블레다가 이어받은 제국은 서쪽의 알프스 지방과 발트 해 연안에서 동쪽의 카스피 해 근처까지 걸쳐 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마르구스(포자레박)에서 동로마 제국과 체결한 평화조약을 통해 처음으로 공동통치자로서 역사에 나타났다. 이 조약으로 동로마는 지금까지 훈족에 지불해왔던 보조금을 2배로 늘리고 이후 매년 300kg의 황금을 주기로 약속했다.

435~439년의 아틸라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는 자기 영토의 북부 또는 동부 야만족에 대한 정복사업을 했던 것 같다. 동로마 제국은 마르구스 조약에서 약정한 금액을 지불하지 않았고, 그결과 동로마군이 서부와 동부 국경지대에 머무르고 있던 441년 아틸라는 도나우 강 유역 변경에 대해 강력한 습격을 감행했다.  

그는 싱기두눔(베모그라드)을 포함한 많은 도시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동로마 제국은 442년에 간신히 1년의 휴전을 맺고 서부에 있던 군대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443년 아틸라는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도나우 강변의 도시들부터 휩쓸기 시작하여 나이수스(니시)와 세르디카(소피아)를 향해 제국의 내부로 밀고들어가 두 도시를 파괴했다.   

이어서 콘스탄티노플로 방향을 돌려서 필리포폴리스를 점령하고, 이후 계속되는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의 주력부대를 격파하여 콘스탄티노플의 북쪽과 남쪽 해안까지 진출했다. 훈족 사수들이 콘스탄티노플의 거대한 성벽을 뚫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아틸라는 갈리폴리 반도로 퇴각해 있던 동로마의 나머지 군대를 공격하여 괴멸시켰다. 곧이은 평화조약에서 아틸라는 동로마에게 황금 2,570㎏에 달하는 연체된 공납금을 지불하도록 했고, 연간 공납금을 3배로 늘려 그후부터 매년 황금 900kg을 강탈했다.

443년 가을에 체결된 평화조약 이후 아틸라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445년경 그는 형 블레다를 죽이고 유일한 전제군주로서 훈족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447년에는 동로마 제국에 2번째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 전투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전쟁은 441~443년 때보다 더 큰 규모로 계획되었고, 주공격 방향은 전의 공격지보다 좀더 동쪽인 남동부 유럽의 로어스키티아와 모에시아 지방이었다. 그는 우투스(비드) 강에서 동로마 제국 군대를 맞아 격파했으나, 그 자신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어서 아틸라는 발칸 지방을 황폐화시키면서 남쪽으로 내달아 그리스에 이르렀다. 그리스에 들어온 그는 테르모필레에서 저지당했다. 

이후 3년간의 침략 기간은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외교사절과 아틸라 간의 복잡한 협상과정으로 점철되었다. 이때의 외교적 접촉에 관한 많은 세부 내용은 449년 로마 사절단의 일원으로 왈라키아에 있던 아틸라의 사령부를 방문한 파니움의 프리스쿠스가 쓴 〈역사 History〉에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전쟁을 끝맺는 협정 내용은 443년보다 더 가혹했다. 동로마는 도나우 강 남쪽의 광대한 지역에서 철수해야 했고, 금액은 알 수 없지만 동로마의 공납은 계속되었다.


-. 갈리아 지방 침입

아틸라의 그다음 대원정은 451년의 갈리아 지방에 대한 공격이었다. 이때까지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의 실질적 지배자인 로마의 아이티우스 장군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갈리아 지방의 침략 동기에 대한 기록은 발견된 것이 아직 없다.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에서 자신의 목적은 톨로사(툴루즈)를 본거지로 한 서(西)고트족(동·서 로마 제국의 일부 지역을 정복했던 게르만족)의 왕국이며 서로마의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는 아무런 불만도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450년 봄 황제의 누이 호노리아가 그녀의 반지를 아틸라에게 보내면서 예정된 결혼에서 자기를 구해달라고 간청해왔다. 그러자 아틸라는 호노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선언하고 그녀의 지참금으로 서로마의 반을 요구했다. 아틸라가 갈리아 지방으로 돌아오자 아이티우스는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1세와 협상을 맺어 훈족에 대항할 연합군을 편성했다. 이 전쟁에 대해서는 많은 전설이 남아 있지만 연합군이 도착하기 전에 아틸라 군대가 아우렐리아눔(오를레앙)을 대부분 점령했던 것은 확실하다. 아이티우스와 테오도리크의 군대가 훈족을 몰아내려고 했을 때는 훈족이 이미 이 도시 안에 교두보를 확보한 상태였다. 결정적인 교전은 카탈루냐 평원에서 있었는데, 일부 학자는 마우리카였다고도 한다(두 곳 모두 확인되지 않음). 서고트족 왕이 전사하는 등 격렬한 전투 끝에 아틸라는 후퇴했고, 곧이어 갈리아 지방에서 물러났다. 이 싸움은 아틸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였다(→ 색인 : 카탈루냐 평원 전투).

452년 훈족은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7개 도시, 즉 아퀼레이아·파타비움(파도바)·베로나·브릭시아(브레시아)·베르고뭄(베르가모)·메디올라눔(밀란)을 약탈했다. 아이티우스는 훈족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해에 이탈리아를 휩쓴 기근과 역병 때문에 훈족은 아펜니노 산맥을 넘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453년 아틸라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다. 당시 동로마의 새로운 황제 마르키아누스는 전임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약속한 보조금 지급을 거부했다. 그러나 아틸라는 결혼식 날 밤 급사했다. 그와 그의 보물을 묻은 자들을 살해하여 그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도록 했다. 아틸라를 계승한 그의 아들들은 아틸라의 제국을 분할하여 지배했다.

448년 아틸라의 막사를 방문하여 그를 본 프리스쿠스는 아틸라를 작고 땅딸막한 키에 큰 머리, 깊은 눈, 낮은 코, 가는 수염을 가진 인물로 묘사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아틸라는 성마르고 고함을 잘 치며 사나운 성미였지만 매우 끈질긴 협상자였으며 무자비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프리스쿠스는 아틸라가 주최한 연회에 참석하여 아틸라가 나무 접시에 담은 고기만 먹고 있는 반면, 그의 부하장수들은 은접시에 맛있는 음식을 담아 먹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의 장군으로서의 자질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갈리아 침입 이전까지 아틸라가 거둔 성공을 보면 그가 탁월한 전략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