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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그노 전쟁 (성 바돌로매 제일의 대학살)
작성자 : 약속의 자손  작성일자 : 2014년 05월 20일  최종수정일 : 2014년 05월 26일

 위그노전쟁[ Huguenots Wars ] 

 

1562년~1598년 프랑스에서 발발한 종교전쟁  

 

프랑스 남부는 전통적으로 로마가톨릭에 저항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자연스럽게 이 지역에는 많은 신교도들이 거주했는데, 프랑스에서는 이들을 위그노(Huguenot)라고 불렀다. 위그노들은 주로 상공업에 종사하면서 서서히 성장하여 일정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이들을 견제하려던 프랑스 가톨릭 세력과의 갈등에서 발발한 전쟁이 바로 위그노전쟁이다.

 

프랑수아 1세 때부터 시작된 프랑스 가톨릭의 위그노 탄압은 점점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562년 가톨릭을 신봉하던 기즈 공작이 예배를 올리던 위그노들을 기습공격하고, 이를 계기로 위그노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3차 위그노 전쟁이 끝나고, 일시적인 휴전상태에 들어갔으나, 여전히 가톨릭 세력은 위그노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급기야 1572년 8월 24일 성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 축일의 대학살이 일어나 많은 위그노 지도자들과 위그노들이 사망하고, 신교와 구교 간의 격렬한 싸움이 재개되었다.

 

앙리 3세의 즉위 이후에 조금씩 변화하던 상황은 위그노의 지도자 격이었던 앙리 4세가 즉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앙리 4세는 스스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신교와 구교를 화해시키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이윽고 1598년에 낭트칙령(The Edict of Nantes)을 발표, 36년간 지속되었던 위그노전쟁은 종결된다.

 

위그노전쟁은 프랑스 최초의 종교전쟁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구교 세력의 탄압에 신교 세력이 저항한 전쟁으로 보이지만,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 전 국토는 심각하게 파괴되었지만, 그 피해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 왕권 강화와 질서 회복을 이루어 내면서 이후 프랑스가 유럽의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낭트칙령을 통해서 제한적인 종교적 자유를 보장받은 위그노들은 자신들이 종사하던 상공업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루어 내어 이 역시 프랑스의 발전에 일조하게 되었다.                                                     위그노전쟁 [Huguenots Wars]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성 바르톨로매오 축일 학살(프랑스어: 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은 1572년 8월 24일부터 10월까지 있었던 로마 가톨릭신도에 의한 개신교신도 학살을 가리킨다. 당시 대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이자 국왕 샤를 9세의 동생인 마르그리트와 개신교 신자인 나바르의 앙리[1]와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인 개신교 지도자 콜리니를 포함한 약 1만여 명의 개신교도가 로마 가톨릭 교도에 의해 학살당했다. 같은 기독교도인 로마 가톨릭신도가 개신교신도를 살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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